그런 적이 있었다.
아니 그런적이 있기전에
나는 생각했다.
믿음의 이전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서로의 이해가 있었다고.
서로의 이해가 있었고
그 이후에 서로의 믿음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적이 있었다.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이 싫다고
나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받지 못했다.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음의 태초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완벽한 이해는 없다는 기반을 전재로
당신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노력은
당신을 들여다 보기 위함이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쓸 수 있는 자들이 있는 반면
타인의 이야기 조차 당당하게
쓸 수 있는 자들이 있다.
이둘은 완벽하게 정 반대의 성향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타인 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을 이해했다고 이야기 한 자들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고,
나를 이해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질문은 끝이 나지 않았고
탐구는 목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걸어간다 생각했지만
하늘을 날고 싶은
펭귄의 가벼운 날개짓이었구나.
그런 당신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분석하고 합당한 타당한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분명히 틀렸을 것이다.
당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 전재가 아닌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전재가 된다.
개인과 타인은 완벽히 나뉘고
개인과 개인은 완벽히 나뉜다.
세상에는 나와 너라는 단어가 있고,
우리라는 단어가 있지만
우리는 나와 너로 나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없이는
살아나갈 수 없다.
나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친구가 친구를 생각하는 우정을
연인이 서로를 생각하는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을 배우고
이해를 배울 수 있다.
명확한 답이 아니더라도
그런 것이 있는 듯 하다. 라는 생각또한
썩 좋은 정답이 되지 않으려나.
그리고 나는 틀릴 수 있다.
아니. 틀릴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렇기에 굳이 딱딱해질 필요가 없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순간.
우리의 세상은 꽤나 유연해진다.
큰 충격에 부서질 듯 했지만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이해한다.
나를 이해하지 않는 너도 이해한다.
애초에 이해란 완벽한 무언가가 아니라
알아가기 위한 어떠한 행위이고
노력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행하고 행하여
서로의 믿음을 추구해야만 한다.
아.
나는 틀리지 않았고.
나는 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