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탄생은 너무나도 고귀하지만 괴롭고
죽음은 너무나도 초라하지만 편안하다고.
사람의 탄생은 굉장히 소중하다.
이것은 사람 인간이 아니 더라 해도 생명의 소중함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터이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진리이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넌 특별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사람은 특별하지 않다 대부분 그저 평범할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꿈꾸던지 희망은 품되
환상은 가지면 안된다.
그렇다 나도 당신도 모두 특별하지 않다.
그저 우리는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났을 뿐이니까.
그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삶의 괴로움이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한다면 그저 우연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스스로 자기 위로를 부여해야 한다.
특별한 존재로만 생각했던, 뭐든지 할 수 있고 될 수 있었던 과거의 망상 속에 살다가.
어느 순간 현실에 벽에 부딪히고 머리를 부여잡은 채 탄생의 비화에 대하여 고심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기에 삶은 괴롭다. 어느 것 하나 예상대로 되는 것도 없고, 가끔씩 느끼는 행복은 금방 사라지는 휘발성이
너무나도 강한 감정이다.
그에 비해서 괴로운 감정은 너무나도 오래 남아있는다.
삶은 괴로움이다.
그러면 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본인의 삶의 의의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이런 의 의중에서도 신에 대한 믿음 타인에 대한 충성도 있겠지만, 그것은 한번 배신당해 버리면
반작용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나는 신용을 그렇게 믿지 않는 편이다.
처음 든 생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소중함이나 특별한 감정 같은 자만심 넘치는 감정을 굳이 일깨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존심을 버리고 항시 자기 위로나 스스로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욕해도 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럴 수 있지
호불호를 없애고, 감정을 죽인다.
그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뭐 그래도 가끔씩 드는 충동은 막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신을 믿는 것이다.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는 여러 위인들이나 유명한 사람들도 쓸 만큼 명쾌한 답변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삶에 믿음을 부여한다면 희망을 가지게 된다.
이 희망이란 단어는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삶을 조금 더 밝은 색깔의 조명으로 비춰준다.
하지만 모순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여러 가지 설화들은 대부분 지금의 상식으로 봐서는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범죄소굴로 이루어져 있다.
그때의 사회는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걸 성인들이 요구하면 어쩌겠는가
예를 들어 성서에서는 제물을 바쳐라, 노예의 정당화, 여성의 차별등 등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래도 신을 믿는다는 것은 저런 것들은 제쳐두고 믿음의 대한 장점만 빼가려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사이비 종교인이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믿으니, 대부분 이걸 믿으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뭐가 되었던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신을 믿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은 무엇을 믿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믿음이 만약 감정이라는 범주안에 속해있다면 나는 믿음이라는 감정을 너무 멀리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다면 더 이상의 관계는 없다.
관계가 없다면 삶을 유지하지 못하리니.
아님 말고